[BERU] 暴慢

1/W2024. 5. 2. 17:56

* <리턴 투 미 히어로>  애프터 로그

 

벤은 초원 위에 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뭉개진 시력과 청력으로는 두 사람이 무슨 대화를 어떻게 나누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었지만, 그 분위기가 온화하고 유쾌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목장 주인은 활기찬 인상이었고, 루셰트의 어깨쯤에 올 만큼 작달막했고, 손님들의 어색함을 부드럽게 달래줄 정도의 관록이 있는 여자였다. 숫기 없이 이것저것 묻는 루셰트에게 그녀는 성심껏 답해주면서 야트막한 언덕으로 그를 안내해 자연스럽게 목장을 소개했다. 루셰트는 간간이 언덕 아래로 고개를 돌리며 벤이 자리에 그대로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러기를 10분째였다.

볼 거라고는 멍청해보이는 소나 양뿐인데 설명하고 듣는 자세들은 이 땅 어디쯤에 집을 지을까 고민하는 사람들 같았다. 할 얘기들이 뭐가 그렇게 많은지. 그새 목장 주인은 가까이 다가온 소의 목을 끌어안고 커다란 코에 입맞추며 루셰트더러 만져보라는 듯이 몸을 살짝 비켜주었다. 그는 몇 번인가 팔을 저으며 사양했지만 목장 주인이 몇 번 보채자 소의 콧잔등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아까까지 저기서 풀을 먹는지 진흙을 먹는지 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있던 놈인데 만지고 싶은가. 벤은 얼마간 그 광경을 보다가 매캐한 담배 연기를 뱉고 짧아진 꽁초를 바닥에 버렸다. 품에서 막 네 개비째를 꺼내려던 때였다. 어느새 다가온 루셰트가 삐져나온 담배를 다시 밀어넣었다.

 

“너무 많이 피우지마.”

 

벤은 대답하는 대신 담뱃갑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뭘 하자고 할 건가 싶어 빤히 보는 시선을 뭐라고 해석했는지 루셰트는 답지 않게 말을 망설이다가 몸을 틀었다.

벤은 루셰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그는 자기 시야에 벤이 없으면 불안하다고 했다. 범죄자가 구속구를 뜯어내진 않는지 갑자기 도망치진 않는지 감시하는 입장이어서 그럴 것이다. 이유를 납득하고 난 후로는 늘 그의 옆에서 걷거나 조금 더 앞에서 걸었다. 종종 곁눈으로 루셰트를 바라보면서.

 

“지루한가?”

“별로.”

 

지루할 만큼 평화로운 풍경이었긴 하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완전히 다져지지 않은 땅을 밟다가 단단한 워커 앞코에 돌부리가 걸릴 때마다 우뚝 걸음을 멈췄고, 그럴 때면 루셰트가 저를 부축할 것처럼 팔을 움찔거렸다.

 

“…저 건물 옆길에 산책로가 있어. 비수기라서 오늘 방문객은 우리 둘뿐이야. 편하게… 편하게 있어도 돼.”

“…….”

“춥지는 않나? 외투가 얇은 것 같은데.”

“춥진 않아.”

“추우면 말해.”

“그래.”

 

대화가 끝나자 바람 소리가 귀청을 할퀴었다. 언덕 아래에서 불어닥치는 바람이 루셰트의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을 헝클었다. 나무 그림자 사이로 비치는 햇빛이 야윈 뺨을 더듬었다.

이런 기이한 형태의 데이트에도 어느덧 익숙해졌다.

첫 번째 데이트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최악이 되게끔 벤이 공들여 계획한 데이트여서 그랬다. 인파가 몰린 곳으로 루셰트를 끌고 가면 누구 하나쯤은 과거 유일의 히어로, 몇 번이나 공중파 방송에 긴급 속보로 노출되던 영웅, 은퇴한 후에는 익명의 스토커 빌런의 타겟이 되어 큰 규모의 범죄에 여러 사람을 휘말리게 한 장본인인 그를 알아보곤 했다. 그러면 어김없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소리는 시선을 끌어모았다. 휴대폰을 들거나 사인을 요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루셰트는 창백해져갔다. 그는 벤의 옷을 쥔 채 어쩔 줄 모르는 사람처럼 굳어 있다가 말로나마 정중하게 사과하며 벤을 끌고 인적이 드문 곳을 찾아 숨었다.

벤은 그 모습이 못내 좋았다. 그는 구하지 못한 목숨들에 사로잡혀 죄책감을 놓아주지 않았지만, 가장 최초의 흉터이자 살렸음에도 구해내지는 못한 벤을 의지하곤 했던 것이다. 자신을 뒤로한 채 히어로로서 살다가 멋대로 은퇴한 벌로 그의 명성을 바닥에 처박은 것 또한 벤이었으나… 그는 그 대가로 벤에게 죽음을 허락하는 대신 목줄을 채워 그의 곁으로 데려왔다.

트라우마에 짓눌려 망가진 루셰트 카일러. 사라진 에이스의 잔재. 비겁하고 이기적인 제 주인. 저처럼 더럽고 어두운 골목에서 공황을 앓는 그는 벤 말고는 누구에게도 곁을 허락하지 않았다. 벤은 그에게 보답으로 가장 오래 남는 것을 주고자 했다. 언젠가 흩어져버릴 부드러운 호의나 덧없는 속죄가 아닌, 손 닿는 순간 살이 찢겨나갈 날카로운 유리 조각과 그로써 영원히 새겨질 흉터를. 그리하여 영원히 유일하게 기억되기를.

그런 벤에게 루셰트는 평범한 것들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보통의 데이트, 편안하고 한갓진 여유, 자책하면서도 묵묵히 견디는 고집스러움, 발설하지 않아도 주워담지 못해 흘러나오는 애정 어린 시선과 손길 같은 것들을, 부드러운 키스와 그의 온도를 가르쳤다.

첫 번째 데이트를 제외하고는 모두 루셰트가 주도한 데이트였다. 뭇 연인들처럼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고 강변 산책로를 걷고 집으로 돌아오는 데이트가 있는가 하면 차를 타고 멀리 나가서 천문대에 올라 별자리의 위치를 보기도 했다. 그는 그가 주는 죽음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벤에게 죽음 외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채워주고자 했다. 그와 벤이 평범하게 자라서 만났다면 이랬을 것이라고 보여주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렇게 만나지 않았고, 그런 식으로 대적하지 않았더라면. 벤이 사람을 해치지 않았다면. 루셰트가 모두를 구했다면.

루셰트가 불어넣어준 가정은 벤의 의지에 두 가지를 피워냈다. 함께 사는 삶에 대한 욕심과…

 

“손만 잡고 걸어.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모든 가정을 벗겨낸 지금의 자신에게는 어떤 자리도 남지 않았다는 현실을.

손을 맞잡은 두 사람에게는 어떤 이름도 허용되지 않는다.

 


 

기실 그런 현실을 자각하기 전까지 벤은 주제 넘는 욕망을 키워가고 있었다. 친밀한 스킨십에서 멈추지 않고 속살을 어루만지며 문득 이런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군데군데 이가 빠지고 낡아버린 제 삶에 침입한 온도가 기꺼워져서, 자신을 받아들이는 루셰트를 보는 것이 만족스러워져서 욕망은 하루가 다르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그의 집은 자신의 흔적과 섞여 두 사람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갔다. 그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벤이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돌아가는 공간이 된 것이다.

그 즈음 벤은 상상해본 적 없던 결말을 그리고 있었다. 그의 손에 죽는 것만이 아니라… 어쩌면 그것보다 더 포만한 끝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었다. 눈을 감는다고 들이치는 햇빛을 부정할 수 없듯 벤은 자신의 내밀한 부분이 변해가고 있다고 느꼈다. 다름아닌 루셰트로 인해서. 그는 벤이 갈망하던 히어로 에이스와 달랐고 거리에서 흔하게 지나치는 이름 모를 타인과도 달랐다. 이름 붙일 수 없는 회색지대에 선 그는 누구도 침범하지 못했던 제 영토로 발자국을 남기며 걸어 들어왔다.

그것이 곧 자신을 지나갈 사람의 발자국인 줄 알았더라면 벤은 자신의 변화를 영영 부정했을 것이다.

 

‘그럼 여기에 있어. 네가 살아 있는 동안은 네 곁에서 너를 지킬 테니.’

 

그때 치밀어오른 양가적인 감정을 벤은 어떻게 구분해야 할지 몰랐다. 자신에게 있을 자리를 내어주는 루셰트를 힘껏 껴안아 뒤덮어버리고 싶었고, 동시에 살아 있지 않을 날을 떠올리게끔 하는 그의 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자신을 향한 그의 연민을 박제해 삼키고 싶었고, 동시에 눈앞의 자신에게 상상을 덧씌우는 그가 괘씸해 죽여버리고 싶었다. 하루하루 그가 아까워지는 한편으로 증오가 들끓었다. 

자신을 거두고 삶을 꿈꾸게 했으면서 떠날 준비를 할 거라면, 도대체 지금까지 그가 제게 보인 호의는 뭐였을까? 말년에 좋은 일 하나쯤 해두려는 것치고는 제법 지극정성이지 않았나. 책임감 없이 풀어줄 거였다면 그가 말없이 숨겨둔 구속구의 열쇠로 자신을 놓아주면 됐을 일이고, 책임을 질 거라면 그는 아무도 남지 않은 삶에 자신을 살아 있게 한 죄에 대해서도 속죄해야 마땅하지 않나. 친절히 속죄할 방도를 알려주고 공들인 무대를 걷어찬 건 그가 아닌가.

거듭 골몰하던 벤은 제 목을 죈 초커를 만졌다. 답은 형상으로서 이미 존재했다.

사육하는 대상의 배신감 따위야 사육자 입장에서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내 입으로… 나의 적이던 사람에게 애정이 쌓인다고, 그의 다른 면도 궁금하다고, 평범한 그의 모습도, 나와의 일상도 궁금하다고… 그렇게 직접 건넬 만큼 뻔뻔하지 않아. 한때 네가 말했던 것처럼 나는 비겁자거든.’

‘…….’

’…그러니 나는, 존재하지 않는 너와 나를 상상하는 거야.‘

 

그렇듯 단호한 부정을 맞닥뜨리고서 벤의 욕망은 멈췄다. 그것이 그가 일깨워준 현실이었다. 자신의 갈망이야말로 그의 상상만큼이나 헛된 것이었다. 우리, 아니, 두 사람에게는 어떤 명분도 줄 수 없다고 그는 거절했다. 모순적이게도 벤은 그제야 자신이 외면하던 감정의 이름을 알 것 같았으나, 그가 건넨 유리 조각에 속이 긁혀 감히 그 이름을 발설할 수 없었다. 그의 자기혐오, 무기력함, 죄의식… 그런 것들이 입 안에 쓰게 고였다. 벤이 받아들인 것은 비단 부드럽고 온화한 것만은 아니었던 셈이다.

’이게 당신이 날 데려온 이유였군.‘

그렇다. 그는 속죄할 이유가 없다. 자신의 삶을 망친 것은 자신이고, 그의 삶을 망가뜨리고자 선택한 것도 자신이다. 벤은 자신이 피해자임을 주장하며 그에게 속죄할 것을, 제게 안식을 줄 것을 재촉했으나 실상 벤은 루셰트의 피해자인 적이 없었다. 그는 제게 품은 애정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루셰트 카일러야말로 벤의 피해자였으므로.

이것을 깨닫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루셰트 카일러의 온도와 닮은 유리 조각이 뺨을 긁고 흘러내렸다.

 


 

벤은 아무도 없는 풍경을 감흥 없이 바라봤다. 있는 거라곤 풀과 나무, 소나 말, 그 사이를 뛰어다니는 양 정도가 다였다. 멀리서 목장 주인이 가족들과 목장을 관리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그 모든 풍경이 흐릿했다. 정확히 그만큼 아무런 가치도 의미도 없는 세상이었다.

같은 풍경을 보는 루셰트의 옆모습을 응시하자 그가 기척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돌렸다. "왜?"하고 묻는 듯했으나 바람 소리에 묻혀 확실하게 알아듣기는 어려웠다.

이런 것들이겠지. 앞으로 제게 남을 기억은.

남은 삶 동안 그에게 사육되기를 선택한 자신에게는 루셰트가 있는 풍경이 남을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자신과는 유리된 채로. 나란히 서되 어느 지점에 다다르면 그는 자신과 다른 곳을 향해 방향을 돌릴 것이다. 곧바로 따라가지도 못하게 막고서 영영 떠나겠지. 그의 수치인 자신을 남겨두고, 문드러진 죄책감을 짊어지고서.

그리고 그 순간이 올 때까지 그는 수치스럽게 나를 사랑할 것이다. 영원히 존재할 바다를, 태곳적부터 인내해온 산을, 끝없이 멀어지는 별을 보여주면서, 이 넓은 구금실에 함께 갇힌 채.

그에게 고개를 숙여 마른 입술을 겹쳤다. 담배 향기가 바람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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